#. 최근 강북의 A재건축조합은 조합원 분양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반에 가까운 조합원들이 분양신청을 하지 않고 현금청산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집보다는 돈을 달라는 것. 심지어 인근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조차 조합원들에게 현금청산을 유도하고 있다. 조합과 시공사는 난처해졌다. 늘어난 현금청산금을 지불할 여력이 없어 사업추진 여부조차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현금청산자들이 급증함에 따라 2014년 예정된 다수의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적색등이 켜졌다.
현금청산은 재개발·재건축사업에서 조합원이 새 아파트의 분양권을 포기하는 대신 조합으로부터 현금을 받고 사업에서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조합원이 빠져나간 자리를 일반분양분으로 메워야 한다는 것. 미분양 리스크가 커지는 가운데 현금청산자가 증가하는 것은 조합이나 시공사에게 결코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최근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에서 현금청산을 요구하는 조합원이 예년보다 2배 가까이 늘고 있어 사업 추진에 차질이 우려된다. 변선보 법무법인 한별 변호사(감정평가사)는 “2006~2008년 경기가 좋을 때에는 현금청산자가 전체 조합원의 20%가 채 안됐다”며 “반면 요즘에는 현금청산자 비중이 30~35%, 심지어 40%에 달하는 조합도 많다”고 말했다.
윤상필 도시환경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강북 미아동의 B재건축조합의 경우 처음에는 현금청산자가 전체조합원의 10%도 안됐는데, 최근 사업시행인가 변경 후 분양신청을 다시 받으니 20% 이상이 현금청산을 원했다”면서 “사업성이 좋아졌지만 집값이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보니 아파트 분양권에 대한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남권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윤 실장은 “강남도 아파트값이 부동산 호황기에 비해 평균 30%이상 떨어졌다”며 “강남 재건축단지들도 현금청산자가 늘어남에 따라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당부했다.
◆청산자 급증→조합 자금난→사업중단
그렇다면 현금청산자가 늘어나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 현금청산자가 늘어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청산금이다. 청산자들에게 줘야 할 청산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사업의 주체인 조합이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다.
변 변호사는 “집값을 3억원이라고 봤을 때 현금청산자가 100명이면 300억원이 청산금인데 이 돈이 2배로 늘었다는 것”이라며 “일반인들로 구성된 조합에는 돈 나올 구멍이 없고 자금줄인 시공사들도 경기침체 여파로 상황이 어렵다보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라고 말했다.
결국 조합은 은행으로부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청산금에 이주비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1000억원을 훌쩍 넘어선다. 조합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금액이다.
은행으로부터 PF대출을 받으면 그나마 다행. 조합에 대한 은행의 신뢰도가 낮아 대부분 대출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윤 실장은 “국내 은행들은 조합을 믿지 못해 PF대출 시 전제조건으로 시공사 보증을 내세운다”며 “하지만 시공사도 현금청산 급증에 따른 채무액 증가로 부담이 커져 보증을 잘 해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금청산자 급증은 결국 사업중단 사태까지 야기할 수 있다. 청산자가 늘어났다는 것은 그 조합의 아파트 자체의 투자가치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 변호사는 “사실 강남 같은 경우는 청산자가 많지 않다”며 “주로 경기도나 인천, 서울 강북 쪽 사업장에서 청산자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사업성이 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청산자가 40% 이상 나오게 되면 착공을 미루고 공사자체를 안하려는 시공사들이 많다”며 “사업을 끌고 갔다가 미분양이 나게 되면 시공사로서는 공사비도 못 건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사업중단' 대책 어떻게…
더욱 큰 문제는 현금청산자 증가에 대해 딱히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현금청산자가 늘어나는 것은 경기침체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변 변호사는 “현금청산 증가는 청산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부동산시장이 안 좋은 가운데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라면서도 “적어도 현재 추진 중인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정상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재개발·재건축구역은 일반 주택지역에 비해 건물 노후도가 심하다. 사업 완료가 시급한 이유다. 윤 실장은 “무엇보다도 조합이 스스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자금 지원 루트를 만들어줘야 한다”며 “시공사를 대신해 대한주택보증·주택금융공사·지자체 등에서 보증을 서주거나 신탁사 등의 참여도 이끌어 자금차입을 지원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청산자들이 늘어나 사업이 중단될 경우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청산자가 증가하게 되면 사업이 중단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어떻게 그 사업을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이 전무한 실정이라는 것이다.
현재 사업 중단 시 마련된 유일한 대책은 ‘조합 해산’ 뿐이다. 변 변호사는 해산은 결코 대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해산 이후 발생하는 매몰비용 등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대책이 없다”며 “구체적으로 비용을 어떻게 정산할 것이며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 법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병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