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번복으로 생긴 공백 2주간,
수도권 52곳중 38곳서 투기거래...
동아일보 | 2021.08.11
부동산 정책 비웃은 공공개발 투기
빌라 벽에 나붙은 ‘공공개발 찬성’ 독려 안내문 10일 인천 부평구 한 빌라에 공공 개발사업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독려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올 5월 이 지역이 공공 개발사업 후보지로 선정된 뒤 입주권을 노리고 다세대 연립 등을 사들이는 투기 의심 거래가 늘었다. 인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10일 오후 인천 부평구 십정동 D빌라.
전철 1호선 동암역과 인접한 이곳은 낡은 단독주택과 빌라, 저층 상가가 밀집해 있었다. 2명이 공동 소유 중인 D빌라는 수년간 매매거래가 없었지만, 6월 18일부터 불과 닷새 동안 20채 중 13채가 팔렸다. 또 다른 1채는 소유주와 가까운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증여됐다.
D빌라 매수자들은 매매계약서를 쓴 지 1, 2일 만에 소유권 이전등기까지 마쳤다. 한두 달에 걸쳐 계약금, 중도금, 잔금 등으로 나눠 내는 주택 매매대금을 한꺼번에 치른 것이다. 현지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인근에 3채를 갖고 있던 집주인도 한 채는 자녀에게 증여하고, 다른 한 채는 다른 가족에게 팔았다”고 귀띔했다.
인천 동암역 일대는 올 5월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주도 도심복합개발 사업의 역세권 개발 후보지로 지정됐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6월에 사업 후보지 토지 소유주에 대한 입주권 제한 적용 시점을 당초 2월 5일에서 6월 29일로 늦추자 6월 16일부터 28일까지 규제 공백기가 생기면서 투기성 거래가 잇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거래는 사업 후보지 52곳 중 38곳에서 일어나 정부가 성급하게 정책을 추진했다가 반발이 거세지면 다시 정책을 바꾸며 투기 세력에 문을 열어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 규제 공백 2주, 수도권에 투기성 거래 집중
동암역세권의 경우 6월에 74채가 거래돼 700명 안팎으로 추산되는 기존 토지주의 10%가 넘는 투자자가 새로 유입됐다. 국토교통부는 2·4공급대책에서 전체 토지주 10% 동의를 받을 경우 후보지 예비구역 지정이 가능하도록 했다. 외부 투자자 의사만으로도 사업 추진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게 유입된 외지인들이 공공사업을 밀어붙이는 역할도 하고 있다.
실제 이날 동암역 일대 골목에는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주도 개발에 동의하라고 독려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한 주민은 “우리 동네에 부동산을 보유한 중개업자들이 외부 투자자를 끌어들여 빌라를 매입하게 하고, 이후 찬성 서명을 받는 등 지역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며 “사업에 반대하면 입주권을 못 받는다는 등 없는 말을 지어내기도 한다”고 했다.
이 같은 투기성 거래가 후보지 내 집값을 끌어올려 향후 보상 규모가 크게 불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빌라 건물이 여러 명에게 비싼 가격에 팔리면 보상금과 보상을 위해 필요한 입주권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공개발 후보지 9곳이 몰려 있는 서울 은평구 일대가 그런 예다. A 씨가 보유하고 있던 은평구 한 빌라의 경우 20채 중 16채가 6월 20∼25일 4억5000만 원 안팎에 거래됐다. 올해 3월 후보지 지정 전만 해도 3억 원 중반에 팔렸지만 최근 약 1억 원이 오른 것이다.
다른 1채는 A 씨의 배우자로 추정되는 B 씨가 매입했다. A 씨는 이 거래를 하며 B 씨가 매입한 빌라로 전입했다. 2채는 가까운 사람에게 증여했다. 단 5일 만에 A 씨는 빌라를 판 시세차익에 입주권 3개까지 얻은 것이다. 인근 부동산 중개사무소 관계자는 “6월에 입주권 불허 시점이 바뀐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2주 동안 갭투자 매물이 모두 거래됐다”고 했다.
소액이라도 이익을 보려는 ‘단타매매’까지 벌어졌다. 인천 제물포역세권 후보지 건물 한 동의 12채짜리 빌라는 1채만 남기고 모두 소유주가 바뀌었다. Y 씨는 6월 19일 7200만 원에 빌라를 매입해 22일 등기를 한 뒤 24일 7300만 원에 다시 매도했다. 이틀 사이 1000만 원을 챙긴 셈. 이를 매입한 P 씨는 4일 만인 입주권 제한 시점 하루 전인 28일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 “과열 없다”던 정부, 정책 신뢰 떨어뜨려
전문가들은 정부와 여당이 아마추어식 대책을 성급하게 추진하면서 투기세력에 여지를 준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공공주도 개발을 위한 공공주택특별법 개정안은 입주권을 무리하게 제한한 규정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땅투기 사태가 겹쳐 올 3월부터 국회에 계류돼 있었다.
정부와 여당이 현금청산 기준일을 2월 5일에서 6월 29일로 늦출 당시 투기가 끼어들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법안 통과 때까지 남은 2주간 등기를 마치기 어려운 만큼 실제 투기 가능성이 낮다”고 했다. 당시 국회 속기록을 보면 국토부 관계자는 투기 가능성을 우려하는 질의에 대해 “파악한 바로는 그렇게 과열된 것은 없다”고 답했다. 본보 취재 결과 2. 3일 만에 등기를 마친 사람이 수두룩했던 점을 감안하면 정부의 태도가 안이했던 셈이다.
현재 국토부가 후보지 내 투기 거래 여부를 조사하고 있지만 불법증여나 대출규정 위반 등 구체적인 불법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틈새를 노려 거래했다는 것만으로는 처벌이 어렵다. 투기가 광범위하게 벌어졌다면 후보지 지정 자체를 취소하겠다는 방침이지만 구체적인 기준도 정해져 있지 않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짧은 기간에 정책 기준을 여러 차례 변경할 경우 시장 혼란은 불가피하다”며 “투기 세력이 유입되며 애꿎은 원주민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신뢰를 정부가 스스로 해쳤다”고 지적했다.
이새샘 기자, 정순구 기자, 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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