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달여 후 실태조사 발표
토지주 50% 이상 동의로 조합해체 결정 땐 수천억대 사업비 물어줘야
대다수가 영세민들… "어떻게 갚을지 막막"
● 책임 떠넘기는 정부·지자체
"사회적 갈등 예방해야" 서울시, 지원요 청에 정부 "도덕적 해이 "난색
"다들 영세민인데 수십억 원이 넘는 돈을 무슨 수로 갚아나갈지 막막합니다."
서울 종로구 충신1구역 재개발 조합원들은 요즘 죽을 맛이다. 재개발 반대 주민들이 지난해 서울시에 신청한 실태조사 결과 발표가 2개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만약 토지 등 소유자 절반 이상이 조합 해체를 원하면, 조합원 400여명은 사업비(매몰비용)를 시공회사에 물어줘야 한다.
조합 설립 후 7년이 지나도록 사업시행인가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그간 조합이 시공회사에서 빌려 쓴 돈만 30억 원에 달한다. 위약금까지 합쳐 조합원당 1,000만 원 꼴이다. 하지만 대부분 하루 장사로 먹고 살거나 집 한 채 쥐고 파지를 줍고 사는 노인들이어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한 실정이다.
서울시 뉴타운ㆍ재개발 출구전략이 매몰비용이라는 벽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빠르면 4월, 늦어도 5월이면 해당 지역 70곳(조합단계 사업장 47곳)의 실태조사가 발표되지만 정작 조합단계 사업장의 매몰비용 대책은 전무한 탓이다.
물론 실태조사는 순기능도 있다. 토지 등 부동산 소유자 50%가 동의하면 조합을 해체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사업성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 무작정 해체가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실태조사는 사업성 유무를 명확히 판단해줘 서울시가 제공한 추정 분담금에 근거해 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부동산시장이 침체 국면이라 아무래도 결과가 발표되면 해체 수순을 밟는 조합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매몰비용에 대한 정확한 산정이 어렵고, 조합단계 사업장은 한 푼도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3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서울시는 지난해 11월 추진위가 해체된 사업장의 매몰비용을 70%까지 지원하기로 하고 39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하지만 추진위 과정을 넘어 조합단계에 이른 사업장은 대상에서 빠졌다. 서울시 예산만으로 추진위 단계보다 훨씬 많은 비용(수천억 원 추정)이 들어간 조합단계 사업장까지 지원하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서울시 전체 조합당 사업비는 평균 50억원 규모. 이를 단순 계산해도 실태조사에 포함된 조합단계 사업장 47곳 중 30%가 해체되면 약 700억 원, 절반이 해체되면 1,175억원의 매몰비용이 발생한다. 더구나 이달부터 기존 47곳 외에 추가로 신청한 조합단계 사업장 20곳에 대한 실태조사도 시작된다. 아직 신청하지 않은 조합단계 사업장도 100여 곳이 넘어 매몰비용 규모는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서로 책임을 미루는 상황이라 당장 획기적인 해법이 나오긴 어렵다. 서울시는 뉴타운 사업의 공공성과 사회적 갈등 예방 차원에서 정부가 매몰비용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국토해양부는 "민간사업에 세금을 투입할 이유가 없고 도덕적 해이가 우려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조합단계 사업장 매몰비용 지원을 허용하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국토해양위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이지만, 현재로선 통과 가능성이 희박하다.
전문가들 의견도 엇갈린다. 조문현 한양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가 뉴타운이나 재개발 사업을 강제하지 않은 이상 정부가 매몰비용을 지원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반면 조명래 단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뉴타운 사업 등은 도로 건설처럼 공공성도 있는 만큼 정부 지원이 사회적 갈등 예방을 위한 사회적 투자"라고 강조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민간 사업에 세금을 쓰는 건 옳지 않지만 과거 정부와 정치권이 주민들을 부추겨 사업을 진행했으니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을 보였다.
이처럼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뉴타운 출구를 봉쇄할 매몰비용이라는 시한폭탄의 초침은 불과 한 달여의 시간을 남겨둔 채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김민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