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구포신'(除舊布新). '묵은 것은 없애고 새 것을 펼치라'는 뜻의 사자성어다. 2년 전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른바 '뉴타운 출구전략' 카드를 꺼내면서 생각한 것도 이와 같으리라. 삽 한번 뜨지 못하고 주민과 업체 간 반목하며 불신만 쌓인 채 '시간이 멈춰버린' 서울시 뉴타운을 구원하기 위해 박 시장이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사업은 지지부진한 국면을 이어가고 있고,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 간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추진된 지 어언 2년이 훌쩍 지난 뉴타운 출구전략. 말 많고 탈 많던 박원순표 출구전략의 끝은 어떻게 맺어질까. <머니위크>는 '박원순 2기' 출범을 맞아 뉴타운 출구전략을 점검했다. 직접 뉴타운 현장을 찾아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고 뉴타운의 남은 숙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도 살펴봤다.
그 때가 언제쯤이었을까. 뉴타운(재정비촉진지구)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던 그 시절. 아마도 2000년대 초반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만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가 '뉴타운'으로 선정되면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도 한 듯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뉴타운은 '미운 오리' 대접 밖에 받지 못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고 그때의 환호성은 이제 뉴타운 해제를 원하는 처량한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뉴타운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 찬란했던 그 시절에는…
뉴타운은 지난 2002년 10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은평·길음·왕십리를 시범뉴타운으로 지정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서울시는 강남과 강북의 지역 간 불균형을 해소하고 기존 재개발·재건축사업의 한계를 개선하기 위해 '뉴타운'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강북의 낙후된 지역들이 뉴타운 지정 후 '핫 플레이스'로 부상했고, 인근지역의 집값 상승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련의 상황에 주민들은 너도나도 "우리 동네도 뉴타운으로 지정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의 폭발적인 반응에 신이 난 서울시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이듬해인 2003년 11월에는 한남·아현·가재울 등 12개 구역을 '2차 뉴타운'으로 지정했고 이어 2005년 12월에는 신길·장위·흑석 등 10개 구역을 '3차 뉴타운'으로 지정했다. 뉴타운 열풍은 수도권을 거쳐 전국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그 시절 뉴타운사업을 추진하는 구역의 모습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구역 전체에 활기(?)가 넘쳤다. 특히 시공사 선정을 앞둔 구역은 더했다. 시공권을 차지하기 위해 펼쳐지는 건설사 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금품과 향응제공이 당연시됐다. 구역 내에서는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구역을 활보하는 건설사 홍보요원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주말에는 설명회란 명목 하에 버스를 대절해 인근 명소로 여행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때 고가의 식사제공은 덤. 물론 모든 뉴타운구역에서 금품과 향응이 제공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잊을만 하면 터지는 뉴타운 금품향응 적발사고는 투명하게 사업을 추진하는 구역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뉴타운사업의 꽃이라고 불리는 '시공사 선정총회'가 열리는 날이면 구역 전체가 그야말로 축제분위기다. 총회에는 유명가수들의 축하무대가 흥을 돋우고 냉장고·TV 등 고가 상품의 경품추첨도 이어졌다.
심지어 뉴타운의 인기에 힘입어 급부상한 직종도 있다. '정비업체'가 바로 그것. 뉴타운은 주민이 주체가 돼 추진되는 사업인데 일반 주민들로서는 뉴타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많은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채워주던 곳이 정비업체다.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서류작성부터 계약체결까지 사업전반에 대한 조합의 모든 업무를 지원했다. 그 역할이 워낙 막중하다 보니 일각에서는 정비업체를 잘 뽑아야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정비업체의 권위가 하늘을 찔렀다.
예전 정비업체 직원으로 일했다는 A씨(37)는 "뉴타운사업에 엮이는 수많은 협력업체 중에서 조합과 가장 밀착해 있는 협력업체를 꼽자면 단연 정비업체"라며 "수주전에 돌입한 시공사가 가장 먼저 접촉하고 검은손을 내미는 협력업체도 정비업체"라고 회상했다.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10년 후 일어날 비극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 일장춘몽으로 끝난 황금기
"정말 죽겠습니다." 한때 잘나갔던 정비업체 사장의 한마디가 지금의 암울한 현실을 압축한다. 엄살이 아니다. 실제로 정비업체를 비롯한 뉴타운 관련업계 대부분이 극심한 구조조정 한파를 겪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뉴타운의 몰락은 2008년부터 현실화됐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부동산경기 침체 등의 여파로 뉴타운은 사업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금기 시절 무분별하게 지정된 뉴타운지구도 추락의 속도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뉴타운이 더이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는 것을 주민들이 인지하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민들의 반대 목소리는 폭풍처럼 거세졌고 사업을 추진하려는 주민과의 갈등으로 번졌다. 이 같은 분쟁은 결국 각종 소송으로 이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서울시도 뒤늦게 뉴타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 중심에는 박원순 시장이 있었다. 박 시장은 2012년 1월 '뉴타운 출구전략'이라는 카드를 꺼내며 대대적인 뉴타운 수술에 들어갔다.
하지만 수술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출구전략을 시행한 지 벌써 3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렇다할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실태조사' 명목으로 뉴타운사업에 대한 주민 찬·반 여부 확인작업만 3년째 이어지고 있다.
굳이 성과를 하나 꼽자면 서울시 내 계획됐던 34개 뉴타운지구의 총 355개 구역 중 17개 구역을 해제시킨 것. 수익성을 분석해 될 만한 곳은 지원사격을 통해 사업추진 속도를 높이고, 안될 곳은 서둘러 구역을 해제한 뒤 다른 대안사업으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것이 시의 방침이다.
하지만 구역해제 수순을 밟은 구역의 상황도 좋지 못하다. 매몰비용(사업을 위해 투입된 후 회수할 수 없는 비용) 등의 문제를 둘러싼 주민과 건설사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어서다.
더 큰 문제는 길을 잃고 표류 중인 뉴타운구역들이 수년에 걸친 사업지연으로 인해 마치 '할렘가'처럼 슬럼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뉴타운구역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부분이 바로 열악한 주거환경이다. 소방차 한대가 들어가기도 힘든 좁은 골목길은 화재 등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내리는 노인들의 모습은 위태롭기만 하다.
낡은 건물과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처절하다. 지붕은 헐어 비가 새고 벽에는 금이가 곰팡이가 득실거린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들 사이에서 주민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변선보 뉴타운전문 변호사는 "누군가의 말처럼 뉴타운은 '실패한 사업'일지도 모른다"며 "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떠나 하루빨리 쾌적한 주거환경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박원순 시장의 2기 시정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렸다. 박 시장의 '뉴타운 출구 찾기'가 더이상 늦어져서는 안된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김병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