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부 재개발.재건축 조합원들이 시공사에 매몰비용 포기를 요구하는 등 정비사업에 사용된 매몰비용을 둘러싼 갈등이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공사가 내년 연말까지 추진위원회나 조합이 사용한 정비사업 비용 관련 채권을 포기할 경우 법인세(22%) 감면을 골자로 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올 초 시행됐지만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사례도 나오지 않아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시공사에 "매몰비용 포기해달라"
7일 건설.부동산업계 및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추진위나 조합이 해산할 경우, 자금을 빌려준 건설업체 등이 투입한 비용을 손실로 처리하면 법인세를 감면해주는 내용의 '조세특례제한법 일부 개정안'이 올 초 통과됐다.
사실상 넉달이 지났음에도 도정법 및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정비사업조합에 대한 채권을 포기한 시공사는 나오지 않고 있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현실적으로 법인세 감면액이 전체 매몰비용에 비해 소액이라는 점에서 시공사가 선뜻 나서지 않기 때문. 이로 인해 사업이 사실상 중단된 구역에서 조합 임원들과 일반 조합원들 사이의 갈등만이 첨예한 상황이다.
실제 지난달 30일 서울 사당1·신정2-1·도봉3구역의 비상대책모임은 서울 서초동 삼성물산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참석한 주민 50~60여명은 각 시공사들이 정비사업 채권 청구를 포기하고 조세제한특례법에 따른 손금 산입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도시정비사업이 좌초된 원인에는 시공사 역시 책임 있는 주체 중 하나인 만큼 더 이상 사회적 갈등을 가중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해산된 정비사업 조합에 매몰비용 포기를 선언하고 아직 해산되지 않았으나 반대가 심해 사업이 중단된 구역에는 조속한 사업 정리를 위해 전향적인 태도로 매몰비용 문제를 처리해달라"고 요구했다.
양천구 신정2-1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의 경우 삼성물산으로부터 99억7800만원의 사업비를 대여 받았다. 그러나 이곳은 토지 등 소유자의 약 40%가 해산동의서를 제출하는 등 반대가 심한 데다 사업전망이 불투명해 삼성물산은 더 이상 사업비를 대여해주지 않고 있다.
반면 조합 임원들은 99억여원의 매몰비용 책임 때문에 어떻게든 사업을 진행시키려 하는 등 진퇴양난에 빠진 상태. 주민들은 시공사가 한발 양보해 퇴로를 열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재개발행정개혁포럼 전문수 사무국장은 "사업 과정에서 시공사가 도급계약만 하고 시공만 하려한 게 아니라 조합과 함께 사업을 진행한 측면이 있는만큼 책임도 함께 져야한다"고 말했다.
난감하기는 건설업계도 마찬가지다.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사실상 매몰비용 문제는 법적 절차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며 "법인세 감면액과 매몰비용은 차이가 큰데 누가 채권 대신 세금감면을 택하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조합원들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몰비용 대신 법인세 감면을 받으라는 것은 지나치다"고 덧붙였다.
■"큰 손해 감수 요구는 부당"
실제 과거 시공사가 매몰비용을 받지 않은 사례도 있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 1069번지 일대 면목 3-1구역의 경우, 조합원들이 과도한 분담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정비구역 해제를 요청해 해제됐다.
시공사는 이때 30억여원의 매몰비용을 받지 않았다. 총 199가구 아파트를 짓는 사업으로, 당시 조합원 분양까지 마쳤지만 분양신청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사업추진 의지가 적은 곳이었다. 시공사 관계자는 "사정이 좋아져 사업을 재개하면 그때 다시 우리와 하자는 조건으로 매몰비용을 받지 않기로 했다"며 "사업 구역이 작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매몰비용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공론의 장이 만들어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지자체 등 행정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재개발행정개혁포럼의 전 사무국장은 "시공사가 매몰비용을 포기하고 나가는 게 주민들 입장에서는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따라서 행정당국과 조합, 주민, 시공사, 정비사업 관리업체 등이 공동논의하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