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의 재발견…
주변경관 안막고, 지역민에 ‘담’ 허물고
한겨레 2013.05.19
[한겨레] 서울시 ‘공공건축’ 설계도 보니
서울 시가지를 둘러보면 ‘아파트의 숲’이다. 우리의 아파트 살이는 건강한가?
재건축을 통해 아파트 공간을 개방하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려는 곳이 있다.
가락 시영·잠실 5단지 ‘혁신’
성냥갑’ 아닌 높이·형태 다양화
구릉·수변 등과 조화롭게 배치
지역에 단지안 공용시설 개방도
공공건축가와 주민의 합작품
계획에 반감·우려도 있었지만
공유·공생의 가치로 결국 합심
부동산 침체 계기로 새 흐름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파트는 어쩌면 우리네 삶의 시작과 끝일지 모른다. 은행 빚, 아이들 교육, 출퇴근, 이웃과의 모둠살이 등 거의 모든 걸 아파트가 결정하다시피 한다. 부동산 경기가 좋았을 땐 ‘돈 되는’ 아파트로 만족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아니다. ‘살고 싶은 아파트’는 어디 없을까?
■ ‘조금’ 다른 아파트 단지 지금까지 재건축 아파트라고 하면, 건물은 깨끗하고 화려해졌지만 건물 간격은 좁아지고 층수는 올라갔다. 재건축 비용을 뽑아내려면 고밀도 건축이 불가피했던 탓이다. 호젓하거나 아늑했던 동네 분위기는 사라지고, 예전 주민들이 새 아파트로 돌아와선 “숨이 막힌다”고들 한다.
서울시가 지난달 25일 ‘조금 특별한’ 재건축 아파트 단지 조감도를 공개했다. “사람과 장소가 중심인, 미래지향적 공동주택을 만들겠다”는 설명과 함께.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송파구(68만여명)의 잠실 주공 5단지 아파트와 가락 시영 아파트가 첫 대상지로 소개됐다.
건물 형태부터 기존 아파트들과 근본적으로 달리 짓는다. 똑같은 초고층 건물이 줄지어 있는 ‘성냥갑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건물의 높이와 형태를 다양화했다.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 단지의 ‘겉멋’이거나, 주변 경관을 무시한 채 홀로 ‘잘난 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 단지는 조화와 공유를 추구한다. 구릉지나 수변, 문화재 등 주변 경관과 어울리게 건물을 배치한다. 입주민뿐 아니라 이웃 동네 시민들도 구릉지와 수변 등에 쉽게 드나들도록 ‘길을 터줘’ 접근성을 높인다. 입주민들만 독점하는 게 당연시됐던 노인정, 도서관, 헬스장 같은 공용시설도 주변 지역민들과 같이 쓸 수 있도록 크고 다양하게 짓는다.
새로 지을 잠실 주공 5단지 아파트들은 한강의 경관을 독점하지 않는다. 이웃한 반포·잠실의 초고층 단지들이 내뿜는 압도적 위용과 다르다. 밤이면 아무도 걷지 않을 듯한 지하철 잠실역에서 한강에 이르는 가로에는, 왁자지껄한 아케이드가 만들어진다. 인근 지역민도 함께 쓸 노인복지시설과 육아시설, 미술관, 공연장, 도서관, 창업지원센터도 들어선다.
가락 시영 아파트는 아예 단지의 중심을 주변 지역민들에게 내준다. 너비 160m로 단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1㎞ 길이 공원이 인근 탄천까지 이어진다. 공원엔 극장, 수영장, 헬스장, 도서관 등 지역민들이 함께 쓰는 공용시설이 들어선다. ‘빛이 가득한 마을’을 열쇳말 삼아, 경관을 해치지 않는 성긴 건물 배치로 단지 전체에 그늘진 곳 없이 고루 햇볕이 들게 한다. 범죄나 오염 같은, 단지를 개방하는 데 따르는 부담과 우려를 줄이려는 취지다.
■ 주민들과 공공건축가 ‘합작품’ 잠실 주공 5단지와 가락 시영 아파트 단지가 이처럼 새로운 형태로 짓기로 결정하기에는 공공건축가의 몫이 컸다. 서울시는 지난해 공공건축가를 위촉해 이들 단지의 재건축 사업을 지원했다.
지난해 4월부터 계획안을 다듬어온 잠실 5단지에서 공공건축가들은 주민들에게 ‘단지가 아닌 도시’, ‘공유와 공생’을 강조했다. 지금의 아파트 문화에서 단지의 공유시설을 인근 지역민에게 개방하는 것에 대한 반감과 우려는 만만치 않다. 잠실 5단지에 대표 공공건축가로 참여한 권문성 성균관대 교수(건축학)는 “한국 공동주택의 문제는 ‘단지’가 원인이다. 경계를 그어놓고 안쪽만 천국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빼앗고 빼앗기는 관계’를 낳았다. 다른 시민들에게 단지를 열어주면, 입주민한테도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런 변신 시도에는 어쩌면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작용했을 수 있다. 이제까지 재개발이라면 돈벌이(아파트값 상승)가 최대 관심사였지만, 요즘은 살고 싶은 집을 갖겠다는 주민도 많아지고 있다.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이미 성공한 ‘공공건축 아파트’의 사례도 참고가 됐다. 권 교수는 “재건축 사업에선 설계안만 10번 이상 고친다. 공공건축을 통해 이를 단축한 것이 주민들에게 환영받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만족도도 높은 듯했다. 가락 시영 아파트는 2003년 조합이 결성됐지만 10년이나 재건축사업이 정체돼왔는데, 공공건축 아파트로 재설계된 뒤 이달 초 서울시 건축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는 등 사업에 속도가 붙고 있다. 가락 시영 아파트에 사는 조합원 ㄱ씨는 “공간이 열려 있고 공평해 보였다. 로열층 같은 특권화된 곳 없이 고층은 고층대로 저층은 저층대로 나름의 장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락 시영 아파트를 맡은 공공건축가 정진국 한양대 교수(건축학)는 “공간의 형태가 인간의 정서에도 영향을 끼친다. 공간을 열고 확장할수록 사람의 마음도 열리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는 “집은 재산이 아닌 삶으로 봐야 한다. 주민들이 이에 조금씩 동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잠실 5단지와 가락 시영 아파트 같은 시도들이 안착하면 재건축 과정에 공공건축가의 간여를 제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박기용 기자
공공건축이란
개발이익보다 공익성 강조…“성공 선례 만들어야”
서울시, 지난해 공공건축가 위촉
주요국선 보편화…한국은 걸음마
서울시의 ‘공공건축가’ 제도는 지난해 2월 시작됐다. 공공건축가들은 사업비 3억원 미만인 공공건축물과 각종 정비사업에 대한 자문·디자인·기획·설계 등을 한다. 잠실 주공 5단지 아파트와 가락 시영 아파트 단지를 공공건축으로 새롭게 되살리는 데도 이들의 구실이 컸다.
이 제도는 2008년부터 시내 구릉지와 서울성곽 주변 등 경관 보호가 필요한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특별 경관 설계자’란 이름으로 시범적으로 참여하던 것을 개편한 것이다. 45살 이하 젊은 건축가 35명, 총괄계획을 맡는 건축가 17명, 우수 디자이너 25명 등 77명이 임기 2년의 공공건축가로 위촉돼 활약하고 있다.
정유승 서울시 건축정책추진단장은 “이들을 통해 시 공공건축물의 품질과 품격을 높이고 재개발·재건축 등이 사업성 위주가 아닌 지역 특성에 맞는 사람 중심이 되도록 계획 수립을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건축가 제도는 프랑스·일본·네덜란드·영국 등 주요국에선 이미 보편화돼 있다. 프랑스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과 고속열차 테제베(TGV) 역사를 건립하면서 공공건축가를 임명해 기획 단계부터 준공까지 관리하게 했다. 일본도 1970년대부터 새도시 개발 때 총괄건축가 제도를 도입해 ‘구마모토 아트폴리스 프로젝트’ 같은 대규모 개발사업을 기획·총괄하게 했다. 네덜란드는 ‘국가건축가’를 둬 국방부·외무부·교육문화부 등에 대한 자문을 통해 국가 건축정책을 추진한다.
한국은 이제 조금씩 ‘공공건축’ 개념이 번져가는 양상이다. 1970~80년대엔 아파트 공급과 배분이 우선이었다면, 1990년대는 개발과 이익을 좇았고, 2000년대는 용적률(건물 바닥면적 대비 연면적 비율)을 최대한 확보해 사업성을 높이는 ‘밀도의 승부’였다.
2008년 이후 세계 금융위기와 부동산 경기 침체로 아파트가 재산 증식 수단이란 의미가 퇴색하면서 ‘공공건축’ 가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잠실 5단지 아파트 재건축에 공공건축가로 참여한 권문성 성균관대 교수는 “옛길과 지역 특성을 보전하고 지형에 순응하며 공공의 접근성을 높이는 공익을 생각해도 재건축이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잠실 5단지가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발이익보다 공익성 강조…“성공 선례 만들어야”
서울시, 지난해 공공건축가 위촉
주요국선 보편화…한국은 걸음마
서울시의 ‘공공건축가’ 제도는 지난해 2월 시작됐다. 공공건축가들은 사업비 3억원 미만인 공공건축물과 각종 정비사업에 대한 자문·디자인·기획·설계 등을 한다. 잠실 주공 5단지 아파트와 가락 시영 아파트 단지를 공공건축으로 새롭게 되살리는 데도 이들의 구실이 컸다.
이 제도는 2008년부터 시내 구릉지와 서울성곽 주변 등 경관 보호가 필요한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특별 경관 설계자’란 이름으로 시범적으로 참여하던 것을 개편한 것이다. 45살 이하 젊은 건축가 35명, 총괄계획을 맡는 건축가 17명, 우수 디자이너 25명 등 77명이 임기 2년의 공공건축가로 위촉돼 활약하고 있다.
정유승 서울시 건축정책추진단장은 “이들을 통해 시 공공건축물의 품질과 품격을 높이고 재개발·재건축 등이 사업성 위주가 아닌 지역 특성에 맞는 사람 중심이 되도록 계획 수립을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건축가 제도는 프랑스·일본·네덜란드·영국 등 주요국에선 이미 보편화돼 있다. 프랑스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과 고속열차 테제베(TGV) 역사를 건립하면서 공공건축가를 임명해 기획 단계부터 준공까지 관리하게 했다. 일본도 1970년대부터 새도시 개발 때 총괄건축가 제도를 도입해 ‘구마모토 아트폴리스 프로젝트’ 같은 대규모 개발사업을 기획·총괄하게 했다. 네덜란드는 ‘국가건축가’를 둬 국방부·외무부·교육문화부 등에 대한 자문을 통해 국가 건축정책을 추진한다.
한국은 이제 조금씩 ‘공공건축’ 개념이 번져가는 양상이다. 1970~80년대엔 아파트 공급과 배분이 우선이었다면, 1990년대는 개발과 이익을 좇았고, 2000년대는 용적률(건물 바닥면적 대비 연면적 비율)을 최대한 확보해 사업성을 높이는 ‘밀도의 승부’였다.
2008년 이후 세계 금융위기와 부동산 경기 침체로 아파트가 재산 증식 수단이란 의미가 퇴색하면서 ‘공공건축’ 가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잠실 5단지 아파트 재건축에 공공건축가로 참여한 권문성 성균관대 교수는 “옛길과 지역 특성을 보전하고 지형에 순응하며 공공의 접근성을 높이는 공익을 생각해도 재건축이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잠실 5단지가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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