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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로 얼룩진 ‘재개발·재건축’ 그 끝은
‘김영란법 국회 통과.’ 부정부패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모두가 숨죽인 채 눈치만 살피고 있는 가운데 꿋꿋이 비리의 외길을 걷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뉴타운 재개발·재건축으로 대표되는 정비사업 현장들이다.
조합원들을 대표해 투명하게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 조합이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기 일쑤고 조합을 도와 원활한 사업 추진을 도모해야 하는 협력 업체들은 오히려 비리의 빌미를 제공하며 조합을 유혹하는 등 말 그대로 복마전이다. 서울시가 ‘공공관리제도’라는 카드를 꺼내 들며 비리 척결을 외친 지도 5년이 지났지만 성과는 찾을 수 없다.
최근 정비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정부가 대규모 택지 개발을 중단함에 따라 재개발·재건축 시장이 미래 먹을거리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비사업 전반에 만연한 비리의 심각성은 기대감보다 우려감을 더 크게 만든다. 한경비즈니스가 정비사업을 둘러싼 비리의 실체를 파악하고 비리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과 대안 등을 살펴봤다.
정비사업 비리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먼저 정비사업의 구조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정비사업은 도시 기능 회복이나 상권 활성화 등이 필요한 지역에서 도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행하는 사업으로 규모와 사업 방식 등에 따라 뉴타운·재개발·재건축 등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핵심은 정비사업의 주체가 ‘주민’이라는 것이다. 주민 스스로 추진위원회와 조합을 설립해 사업을 추진하는데 시공사·설계사·정비 업체(전반적인 조합 업무를 지원하는 정비사업 전문 업체) 등이 조합을 지원한다. 협력 업체들이다.
정비사업이 ‘비리의 온상’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데에는 사업의 주체인 조합(주민)과 협력 업체가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이 본연의 임무보다 잿밥에 더 큰 관심을 보여서다.
지위 고하 막론 정비사업 비리 만연
지난 2월 검찰에 적발된 서울시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재건축 사업 관련 비리가 대표적이다. 서울동부지검은 2월 5일 3개 협력 업체로부터 총 1억65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잠실주공5단지 재건축조합장 권모(61) 씨를 재판에 넘겼다. 또 권 씨에게 뇌물을 건넨 A 설계 업체 대표 한모(60) 씨를 뇌물 공여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정비 업체 대표 이모(63) 씨 등 3명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지방 사립대 교수인 권 씨는 2014년 9월 용역 업체 선정의 대가로 한 씨로부터 현금 1억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한 씨는 용역 업체로 선정된 이후 편의를 봐 달라며 금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권 씨는 2013년 5월 이 씨에게 5000만 원을, 같은 해 8월 총회 대행 업체 대표 정모(63) 씨에게 1500만 원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신망 받는 지위에 있는 교수가 정비사업 비리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앞서 검찰은 구의원과 전직 구청장까지 기소한 바 있다. 서울서부지검은 1월 21일 가재울·왕십리·거여·북아현 등 서울 수도권 지역 재개발 구역의 비리를 집중 단속한 결과(2차)를 발표했다. 검찰은 재개발 사업에서 공사 업체 선정 및 수주 과정에 도움을 주고 뇌물을 받은 혐의로 현직 구의원 이모(60) 씨 등 3명을 구속 기소하고 전직 구청장 현모(56·별건 수감 중) 씨 등 5명을 불구속 상태로 함께 재판에 넘겼다. 또한 이들에게 뒷돈을 건넨 혐의(뇌물 공여)로 수도관 이설 업체 대표 김모(68) 씨를 불구속 기소하고 정비업자 노모(52) 씨 등 3명을 약식 기소했다.
3선 구의원인 이 씨는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 A재개발조합의 감사를 맡으면서 함께 기소된 전 조합장 최모(68) 씨 등 조합 임원들과 함께 철거 공사를 수주해 주는 대가로 철거 업체로부터 1억5000만 원을 받는 등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총 2억1100여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전 구청장 현 씨는 구청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6~2007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 한 구역의 뉴타운 사업 구역을 확장해 주는 대가로 정비업자로부터 3억 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변선보 법무법인 한별 변호사는 “서부지검이 지난해 7월부터 서울 수도권 주요 정비사업장의 비리를 집중 단속 중인 가운데 불과 5개 구역에서만 총 33명을 적발됐다”며 “정비사업에 만연한 비리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비사업을 둘러싼 비리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조합과 협력 업체의 유착 비리다.
비리 유형도 각양각색
일반적으로 협력 업체는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조합에 접근하는데 이 과정에서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가 시작된다. 특히 시공사는 수주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협력 업체로 꼽힌다. 조금만 사업성이 뛰어나다 싶으면 수주전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조합에 접근해 사전 작업(?)을 시작한다. 목표는 조합장과 조합 임원 포섭이다. 식사 대접 등을 통해 친분을 쌓고 나면 자연스럽게 금품 살포와 향응 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불법행위들은 대부분이 타 지역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만큼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금품 등을 시공사가 직접 전달하지 않고 제3의 협력 업체가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줘 중간에서 꼬리가 잡히더라도 시공사들은 주저 없이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 버린다. 이와 관련해 A 정비 업체 한 관계자는 “간혹 금품 살포 현장을 촬영 당해 덜미를 잡힐 때도 있지만 대부분이 외주 용역(OS) 업체나 철거 업체 선에서 조용히 정리된다”며 “정리 후 유유히 돌아온 시공사는 해당 업체에 수주권 등 소정의 보답을 한다”고 귀띔했다.
협력 업체들이 접근하면 아예 노골적으로 금품 등을 요구하는 조합도 있다. 조합장 등 조합 임원이 조합 내에서 본인의 세력을 확장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한 대형 건설사 정비사업 수주 담당 임원은 “조합 운영비와 별개로 개인을 위해 쓰는 돈인데 현금으로 몇 억 원씩 요구한다”며 “최근에는 대기업 시공사들도 이 같은 비정상적인 자금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아 시공사와 이권이 얽힌 철거나 설계 업체 등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일부 조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음성적 자금 지원을 받아야 하는 정비사업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평범한 주민들로 구성된 조합은 정비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협력 업체, 특히 가장 큰 자금줄인 시공사가 내민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다. 자금 지원의 대가는 향후 수주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해 주는 것이다.
몇몇 조합들은 자금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협약서’나 ‘우선 협상 대상자 약정’ 등의 임시 계약을 하기도 한다. 이면 계약의 실체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조합은 입장이 다른 조합원들의 반대에 부딪칠 때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홍보 요원을 통해 서면결의서를 매수하거나 조작하기도 하는 것이다. 총회에 직접 참석하기 힘든 조합원들의 의결권을 보장해 주는 서면결의서는 마땅한 감독 장치가 없어 언제부터인가 부정부패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공사가 수주를 확정 지은 뒤에도 비리는 계속된다. 다만 주인공은 시공사로 바뀐다. 시공사는 최대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각종 명목으로 공사비 인상에 목을 맨다. 우선 가장 많이 쓰는 편법은 선정 당시 처음 제시했던 공사비를 본계약 시 ‘뻥튀기’하는 방법이다. 천차만별 올라간 공사비에 혼비백산한 조합이 뒤늦게 수습에 나서 봐야 소용없다. 물가 상승, 지질 여건, 설계 변경, 특화 작업, 마감재 등 곳곳에 숨겨진 공사비 인상 요인들이 많아 속수무책일 뿐이다.
건설 회사에 근무하는 광명 A재건축 조합원 김모(59) 씨는 “조합원들이 잘 모르는 부분을 들이대 공사비를 ‘뻥튀기’하는 시공사가 많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금줄을 쥐고 있는 시공사가 조합에 무리한 요구를 하며 불합리한 이익을 취하는 행태는 이미 도를 넘어섰다”며 “서울시가 야심차게 추진한 ‘공공관리제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 비장의 카드 ‘공공관리제’도 유명무실
공공관리제도는 2010년 7월 서울시가 도입한 제도다. 구청장이 정비사업을 관리하도록 해 낡은 관행과 부조리를 없애고 투명성을 높이자는 게 취지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현재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잊힐만 하면 터지는 정비사업 현장의 비리가 생생한 사례다.
하지만 서울시는 공공관리제도 시행이 비리를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산과 인력 등에서 나타나는 한계를 극복하려면 오히려 공공관리제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게 시의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공공관리 담당자는 “공공관리제도 시행과 동시에 ‘클린업 시스템(정비사업 정보 공개 통합 홈페이지)’을 도입해 조합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시공사 선정 시기를 늦춰(조합 설립 인가 시 →사업 시행 인가 시) 공사비 인상 요인을 차단했다”며 “2010년 7월 공공관리가 시행된 후 시공사를 선정한 구역에서는 큰 잡음이 없다는 게 이 제도의 효과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업계 전문가들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다. 특히 추진위와 조합이 설립된 서울시 689개소 전체 구역의 월별 자금 사용 내역 등을 클린업 시스템에 낱낱이 공개하도록 한 게 주효했다는 평가다.
문제는 효과가 극히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일단 공공관리자인 구청장이 다수의 정비사업 현장을 직접 관리 감독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고 수사권도 없어 비리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공공관리제도는 시공사·설계사·정비업체 등 특정 협력 업체의 선정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 밖에 다른 협력 업체들의 이권에는 속수무책이다.
클린업 시스템에서도 미흡한 부분이 지적됐다. 중요 정보가 누락되는 등 상당수 조합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고 자금 내역이나 계약서를 공개하더라도 현금으로 금품을 수수하거나 계약서 작성 이전에 협의된 비리 부분에 대해서는 구경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공공관리제도의 일환으로 시공사 선정 시기를 늦춘 게 정비사업 시장을 크게 위축시켰다며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자금줄인 시공사의 투입이 늦어짐에 따라 조합들이 운영비 부족에 시달리며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윤상필 도시환경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공공관리제도로 어느 정도 비리가 감소했다면 이는 사업 자체가 중단된 구역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며 “공공관리 시범 지구로 선정됐던 성수전략정비구역과 한남재정비촉진지구를 비롯해 대다수 구역들의 사업이 지지부진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공공관리제도도 정답은 아니다. 그러면 정비사업을 둘러싸고 깊숙이 뿌리내린 부정과 부패의 사슬은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전문가들은 과거부터 내려온 구태의연한 관행과 악습을 과감히 끊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는 조합과 협력 업체들의 자구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
먼저 조합은 정비사업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합이 정비사업을 제대로 알아야만 협력 업체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고 비리의 유혹 또한 뿌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 정비사업에 대한 주민 교육 및 행정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시공사 등 협력 업체들의 변화도 필수다. 작은 이익을 위해 건설 시장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는 정비사업을 침몰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무리한 공사비 인상 관행 등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비사업의 주인은 바로 주민”이라며 “조합 임원과 협력 업체 등 핵심 주체에만 의존하지 말고 조합원 각자가 정비 사업에 관심을 갖고 감시 감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병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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